폴 오스터의 마지막 소설 『바움가트너』, 상실과 환지통에 대한 철학적 성찰

『바움가트너』는 미국 작가 폴 오스터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장편 소설로, 죽음과 상실 이후의 삶을 사유하는 지적인 문학 작품이다. 아내의 죽음을 겪은 노년의 철학자가 자신의 존재와 감각을 되짚으며 삶의 의미를 반추하는 여정을 그린 이 소설은, 환지통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 인간 존재의 결핍과 지속에 대해 깊이 성찰한다.

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작가로서의 마지막 발자국

『바움가트너』는 2024년 세상을 떠난 작가 폴 오스터의 유작이다. 『달의 궁전』, 『뉴욕 3부작』, 『우연의 음악』 등을 통해 포스트모던 소설의 대가로 불려온 오스터는, 생애 마지막 소설에서도 역시 뉴욕과 삶의 우연성을 중심에 둔다. 다만 이번 소설은 거대한 서사나 복잡한 메타픽션 대신, 인간 내면의 정원에 천천히 물을 주는 듯한 조용한 서사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주인공 바움가트너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노교수다. 젊은 시절 학문적 명성을 쌓았고, 아내 안나와는 사랑과 지성으로 연결된 오랜 동반자 관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소설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그는 아내의 죽음 이후 10년이 흐른 상태로, 아내가 바닷가에서 수영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후 여전히 그 상실의 그림자 속을 걷고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상실 이후의 삶'을 다룬다. 중요한 사건은 많지 않다. 하지만 한 노인이 자신의 일상, 기억, 아내의 흔적, 글쓰기, 철학적 사유를 거쳐 삶을 어떻게 지탱해가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독자는 자신 안의 결핍과 상처를 비추어보게 된다.

바움가트너, 인간이라는 나무의 정체성을 사유하다

소설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인 '바움가트너(Baumgartner)'는 독일어로 '정원사'를 의미한다. 이는 곧 인간 존재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바움가트너는 삶이라는 정원을 돌보며, 그 속에서 잃은 가지와 떨어진 잎들, 여전히 자라나는 뿌리와 줄기를 바라본다. 그의 아내 안나는 시인이자 번역가로, 출간되지 않은 시집 원고들이 집 안에 남아 있고, 그는 그것들을 폐기하지 못한 채 감정의 거처처럼 품고 살아간다. 폴 오스터는 이 작품에서 감정의 흐름과 기억의 결을 매우 섬세하게 포착한다. 서사는 느리게, 그러나 정교하게 이어진다. 자칫 주변부처럼 보이는 에피소드들조차 마지막엔 한 그루의 나무처럼 가지치기를 통해 하나로 수렴된다. 이러한 구조는 작가가 평생 갈고닦은 글쓰기 기술이 응축된 결과로, '심리스(Seamless)'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이음새 없는 전개가 인상적이다. 작품 곳곳에는 바움가트너가 집필 중인 『운전대의 신비』라는 철학책의 구절, 아내의 시, 과거의 편지, 회상 등이 혼재되어 있으며, 이는 현실과 내면의 경계를 넘나드는 하나의 문학적 '정원'으로 작동한다. 바움가트너는 결국 자신의 존재를 하나의 고목으로, 그러나 여전히 생명력을 지닌 나무로 바라보며, 사유하고 또 살아낸다.

환지통, 상실 이후의 인간적 감각

『바움가트너』는 죽음 이후의 공허함을 '환지통(phantom limb pain)'이라는 의학적 개념으로 풀어낸다. 절단된 신체 일부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통증은, 작중에서는 아내 안나를 상실한 이후에도 그녀가 여전히 곁에 있는 듯한 감각과 정서로 치환된다. 이 환지통은 단지 신체적 고통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과 기억, 존재의 잔상이라는 보다 보편적인 감정이다. 작가는 바움가트너의 내면 독백과 행동을 통해 상실의 무게를 그려낸다. 그는 여전히 아내를 느끼고, 말하고, 때로는 그녀가 방에 있을 것만 같은 착각 속에 산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이야말로 그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산다는 건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고통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은 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는 문장에서 그 철학적 핵심이 집약된다. 결국, 이 소설은 단지 아내를 잃은 한 남자의 사연이 아니라, 사랑하고 잃고 또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모든 관계가 끝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인간은 다시 정원을 가꾸고, 새로운 줄기를 틔우고자 한다. 환지통은 그 흔적이자, 또 다른 생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마지막 문장,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삶

『바움가트너』는 폴 오스터의 마지막 소설이다. 그러나 이 책은 결코 '끝'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실 이후의 지속, 고통 속에서 발견되는 감각, 그리고 존재를 긍정하려는 의지에 관한 문학이다. 정원사라는 이름처럼, 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가지를 치고 뿌리를 살피며 하루하루를 가꿔 나간다. 이 소설은 화려하지 않다. 강렬한 반전도, 충격적인 사건도 없다. 대신 그 안에는 우리가 자주 지나치는 감정의 뿌리와 흔적들이 담겨 있다. 환지통처럼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랑. 바움가트너는 그것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바움가트너』는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 마지막 책을 통해 폴 오스터는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의 상실은 당신의 일부이며, 그것을 안고 살아가는 방식이 곧 당신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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