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멸종: 유토피아 속에서 경험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크리스틴 로젠의 『경험의 멸종』은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직접 경험을 어떻게 대체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하는 비판적 인문서이다. 이 책은 인공지능, 소셜미디어, 알고리즘 등으로 매끄럽게 포장된 기술 세계가 인간의 현실 감각과 공동체 감수성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를 다양한 사례와 철학적 성찰을 통해 드러낸다. 경험을 '보는 것'으로 전락시킨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과연 여전히 인간일 수 있는가? 로젠은 독자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기술 문명 속 인간다움의 복원을 외친다. 이 책은 기술이 만든 유토피아가 과연 우리가 바라는 미래인지 되묻게 만드는 날카로운 경고장이자 철학적 제안서다.


경험의 멸종



소셜 미디어는 어떻게 현실을 대체했는가

『경험의 멸종』은 오늘날의 경험이 더 이상 '직접 겪는 것'이 아니라 '기술로 매개된 간접 경험'으로 치환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과거에는 지도 없이 길을 찾는 것이 일상이었고, 낯선 사람과의 대화가 새로운 정보를 얻는 주요 수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도 앱 하나로 목적지에 도달하고, 질문은 검색창이 대신한다. 이처럼 기술은 인간의 몸을 통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을 주지만, 그 대가로 '몸의 경험'은 사라진다. 로젠은 이를 '경험의 멸종'이라고 명명한다. 가장 충격적인 사례 중 하나는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이다. 1년간 소셜 미디어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투표권을 포기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다수의 청소년들이 투표권을 포기하겠다고 응답했다. 이 결과는 단순한 세대 차이가 아니라, 기술이 인간의 판단과 선택 기준을 어떻게 변형시켰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행위인 '참여'보다도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이 책은 또 하나의 현상을 지적한다. 바로 '보는 경험'의 확장이다. 여행을 가서 풍경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찍어 올리는 것이 목적이 된 사회. 동영상을 보는 자신의 리액션 영상을 올리는 이중 경험의 구조. 로젠은 이러한 과잉된 간접성과 반응 중심의 문화가 결국 인간을 '경험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록되는 존재'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본다. 경험이 콘텐츠가 되고, 콘텐츠는 데이터가 된다. 이는 결국 경험이 상업화되고, 기술적 관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뜻한다. 로젠은 이 모든 변화가 기술 발전의 산물일 뿐 아니라, 사용자들의 '매끄러운 삶'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한다. 현실의 경험은 어설프고, 실패의 가능성이 크며, 항상 불편을 동반하지만, 기술은 이를 자동화하고 최적화함으로써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불완전한 현실보다 매끄러운 가상 세계를 더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기술의 유토피아는 누구를 위한 공간인가


크리스틴 로젠은 기술 세계가 과연 우리가 원하는 유토피아인지 묻는다. 자동적이고, 수월하며, 마찰 없는 세계. 애플의 광고 문구처럼 들리는 이 이상적인 공간은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현실은 언제나 복잡하고 마찰이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감내하고 넘어설 때 진정한 의미의 경험이 발생한다. 반면 기술은 이 모든 것을 삭제하고, 사용자에게 철저히 계산되고 예측 가능한 세상을 제공한다. 실패의 여지가 없는 세계는 인간의 창의성과 인내심, 성찰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술의 발전은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기업의 이윤 추구라는 목적 하에 이루어진다. 로젠은 빅테크 기업들이 기술을 설계하는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자유 확대가 아니라, 사용자의 주의를 수익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고 경고한다. 데이터는 상품이 되고, 사용자 경험은 감시와 통제의 수단이 된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무엇을 좋아할지를 예측하고, 심지어 무엇을 생각할지를 지시한다. 로젠은 이를 가리켜 "인간의 조건이 아닌 사용자 경험"이 기준이 되는 세계라고 표현한다. 그녀는 특히 아동과 청소년이 처음 접하는 경험들이 대부분 기술에 의해 매개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자연, 언어, 놀이와 같은 기본적 경험조차도 이제는 화면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아이들은 물리적 공동체보다는 가상의 커뮤니티에 익숙하고, 타인과의 비언어적 상호작용보다 디지털 피드백에 더 의존하게 된다. 이로 인해 공감 능력, 사회적 직관, 역사적 감각 등이 퇴화할 수 있으며, 이는 공동체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 기술의 유토피아는 결국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는 공간이 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험의 멸종을 막는 유일한 해법: ‘우리’의 회복


『경험의 멸종』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경험의 멸종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라는 선언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기술이 제공하는 편리함을 누리는 동시에, 그것의 폐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대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로젠은 디지털 세계에 휩쓸리지 않고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말하는 '우리'는 특정한 정체성이 아니라, 물리적 공동 공간을 공유하고, 같은 공기를 호흡하며, 서로의 얼굴과 감정을 실시간으로 감지할 수 있는 관계의 집합이다. 이는 단지 향수 어린 회귀가 아니다. 타인의 표정을 읽고, 함께 걷고, 직접 부딪히는 경험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로젠은 시몬 베유의 말을 인용한다. "관심은 가장 희귀하고 순수한 형태의 관대함이다." 관심은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정서이며, 물리적 시간과 공간을 공유해야만 생겨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물리적 공동체를 되살리고, 기술에 매몰된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독서, 산책, 대화, 침묵, 그리고 예술과 같은 비디지털적 경험을 회복할 것을 촉구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기술이 제공하는 예측 가능하고 안전한 삶은 우리를 보호할 수는 있어도 성장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감정, 실패, 마찰이 있는 현실 세계야말로 우리가 성찰하고 사랑하며, 진짜 삶을 살아가는 공간이다. 로젠은 그 공간을 되찾기 위한 선택이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크리스틴 로젠의 『경험의 멸종』은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경험을 어떻게 대체하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삶과 공동체, 인간성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분석한 시대의 경고서다. 이 책은 단순히 기술 비판을 넘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기술에게 위임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삶의 주체성이 약화되고 있다. 그러나 경험은 여전히 인간다움의 핵심이며, 그것은 언제나 타인과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의 실천이다.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경험의 멸종은 우리의 미래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현재의 문제다. 기술이 주는 유혹에 무력하게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불완전하지만 인간다운 삶을 회복할 것인가. 로젠은 말한다. "이제는 잔디를 만져야 할 시간이다." 다시 현실로, 다시 사람 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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