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질서와 무질서, 분류와 혼돈의 경계에서 인간 존재와 인식의 문제를 깊이 탐색한 철학적 논픽션이다. 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우생학의 그림자와, 저자 자신의 무기력과 혼란을 향한 재해석은 독자에게 깊은 성찰을 제공한다. 단순한 전기나 과학 교양서를 넘어, 삶의 태도와 가치 판단, 지적 탐색의 방향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책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문제의식을 제시한다.
분류의 유혹과 혼돈의 가능성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자의 일생을 추적하는 논픽션이라는 외양을 띠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존재론적 사유와 철학적 반전이 담겨 있다. 책의 주인공이자 밀러가 추적하는 대상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실존 인물로, 그는 수많은 어류를 분류해낸 과학자이자, 스탠퍼드 대학의 초대 총장이며, 우생학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밀러는 자신이 느끼는 삶의 혼돈과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해 조던을 롤모델로 삼는다. 그는 어떤 재난이 닥쳐도 냉정하게 질서를 복원하고 분류 체계를 유지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러의 여정은 단순한 영웅 추적이 아닌, 그 영웅이 지닌 믿음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작업으로 전개된다. 조던이 평생에 걸쳐 수행한 분류 작업은 단순한 과학적 분류가 아니었다. 그에게 분류란 곧 질서였고, 질서는 곧 우월성과 열등성을 가르는 기준이었다. 조던의 세계관은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을 위계화하는 우생학으로 향했고, 그 결과는 폭력과 억압으로 이어졌다. 밀러는 이러한 조던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오히려 무질서와 혼돈,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방식으로 사고를 전환하게 된다. 밀러가 초반에 느꼈던 삶의 혼란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필연으로 재인식된다. 무질서는 파괴가 아니라 가능성의 공간이며, 경계 없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인간 본연의 모습에 다가설 수 있다. 이처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과학자의 전기나 에세이가 아니라, 인간 존재를 규정짓는 틀 그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읽혀야 한다.
질서를 향한 맹신과 그 이면의 어둠
이석재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서, 이 책을 '질서가 만든 혼돈 속을 헤엄치다'라는 서평 제목으로 분석하며, 밀러의 메시지가 갖는 철학적 중요성을 짚어낸다. 그의 논점은 명확하다. 질서를 향한 과도한 집착은 오히려 더 큰 혼돈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질서란 언제나 가치 판단과 위계를 동반할 위험이 있으며, 그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별로 이어질 때, 우리는 그 질서를 ‘정당한 것’이라 믿으며 폭력을 정당화하게 된다. 조던의 삶은 이러한 위험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가 추구한 어류 분류는 결과적으로 물고기라는 개념이 생물학적으로 성립되지 않음을 드러냈고, 이는 그가 평생을 바쳐 쌓은 지식 체계가 허구에 기반했다는 역설적 결론으로 이어진다. 더욱이 조던은 단순한 과학자가 아니었다. 그의 확신은 점차 우생학이라는 사상적 폭주로 이어졌고, 그것은 사회적 약자를 도태시켜야 한다는 극단적인 결론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전개된다. 이석재 교수는 이러한 조던의 신념이 지닌 이중성에 주목한다. 의지, 그릿, 신념은 개인의 성장과 극복의 열쇠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견고해질 때, 타인을 향한 배제와 억압으로 전이될 수 있다. 저자는 조던의 ‘강한 의지’를 통해 무질서를 이겨내려 했지만, 결국은 그 의지 자체가 오만과 독선을 부추기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독자는 그러한 전환의 과정을 따라가며, 삶의 혼란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물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밀러의 접근은 단순히 조던이라는 한 인물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는다. 현대 사회 전반에 내재된 '질서의 미신'을 파헤치는 과정이며, 모든 것을 명확하게 나누고자 하는 인간의 습성,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차별과 억압을 경고하는 외침이라 할 수 있다.
무질서와 혼란을 끌어안는 새로운 윤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국 삶의 무질서를 회피하거나 극복해야 할 장애로 보지 않고, 그것을 새로운 의미의 장으로 재해석한다. 이 책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조던을 이상적 존재로 바라보던 저자가 그의 허상을 깨닫는 순간이다. 밀러는 조던의 ‘질서’가 자신에게 진정한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혼란과 예측 불가능성을 지닌 자신만의 삶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흐름은 마치 고전 철학자들이 말했던 ‘변증법적 전환’을 떠올리게 하며, 독자에게 깊은 사유를 요구한다. 이석재 교수는 밀러의 메시지를 동양철학의 비분별지(非分別智) 전통과도 연결시킨다. 우파니샤드나 불교 사상에서는 분별을 멈추고 존재를 전체로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가 강조된다. 이는 곧 현대인이 겪는 가치 혼란과 정체성 위기를 통과하는 하나의 철학적 방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현실 속에서 분류와 판단은 불가피하다는 점도 지적하며, 밀러의 급진적인 시선이 자칫 현실적 판단을 불능으로 만들 수 있다는 우려를 함께 제시한다. 따라서 이 책이 제안하는 것은 분류 자체의 철폐가 아니라, 분류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겸허함이다. 인간은 삶의 모든 국면에서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선택은 곧 분류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분류가 위계를 만들어내지 않도록, 혹은 배제를 정당화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윤리적 감수성이 요구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바로 이러한 사유의 필요성을 감각적으로, 그리고 서사적으로 제시하는 보기 드문 책이다.
우리는 어떤 분류를 믿고 있는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지 과학자의 실패한 인생을 복기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분류라는 이름 아래 진행되는 사회적 위계, 지식의 권력화, 그리고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을 제시한다. 동시에 무질서와 혼란을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이는 삶의 방식도 제안한다. 우리는 매일같이 분류하고 판단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분류는 과연 타당한가? 혹시 그것이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도구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책은 그 물음 앞에 서게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삶의 혼란 속에서 길을 잃은 이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되묻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