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어른을 위한 동화, 어린이를 위한 인생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다.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된다. 얼핏 들으면 말장난처럼 느껴질 이 문장은, 사실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긴긴 밤』은 단순한 동화책이 아니다. 이 책은 상실과 고통을 딛고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긴긴 밤』은 단순한 동화책이 아니다. 이 책은 상실과 고통을 딛고 피어나는 희망의 이야기이며, 한 마리 코뿔소와 한 마리 펭귄이 ‘가족’이 되어가는 여정을 다룬다. 그리고 그 여정은, 누구나 살아가며 한 번쯤 마주하는 ‘긴긴 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본문 1 노든, 이름 없는 코뿔소가 되어가는 길
노든은 태어날 때부터 세상에 홀로였다. 그는 부모의 품을 알지 못했고, 고아로서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라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코끼리가 아닌 코뿔소였다. 하지만 노든은 자신을 코끼리라 믿었다. 넓은 귀와 길게 늘어진 코, 따뜻하게 서로를 돌보는 코끼리들의 세계는 그에게 동경이자 위안이었다. 그런 그에게 코끼리들은 말했다.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코끼리가 있다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이 말은 노든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첫 문장이었다. 정체성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받아들이고 만들어가는 것임을 처음 배운 순간이었다. 세월이 흘러 고아원을 떠나 바깥세상으로 나선 노든은 자신만의 무리를 꾸려 간다. 아내와 딸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따뜻한 햇살 같은 존재들. 하지만 이 행복은 너무나도 쉽게 깨진다. 밀렵꾼들이 코뿔소의 뿔을 노리고 그들의 삶에 침입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딸은 무참히 살해당하고, 아내는 노든의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둔다.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 노든은 인간의 손에 의해 동물병원으로 실려가고, 그 후 ‘파라다이스 동물원’에 감금된다. 거기서 그는 같은 종인 코뿔소 ‘가부’를 만난다. 가부는 말없이 침묵하며, 노든과 비슷한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였다. 두 코뿔소는 서로의 고통을 알아보며 유대감을 쌓는다. 노든은 다시 한 번 탈출을 꿈꾼다. 하지만 탈출 직전, 동물원은 또다시 밀렵꾼들의 습격을 받는다. 가부는 그 혼란 속에서 희생당하고, 노든은 살아남는다. 이제 그는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흰바위 코뿔소’가 된다. 세상은 그를 희귀한 동물로 보지만, 그는 단지 모든 것을 잃고 살아남은 존재일 뿐이다. 그렇게 노든은 또다시 홀로, 이름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본문 2 치쿠, 검은 반점을 품은 펭귄의 용기
이야기의 또 다른 중심에는 펭귄 치쿠가 있다. 치쿠는 태어나면서부터 동물원이라는 인공적인 공간에서 자랐다. 야생을 모르고, 철창 너머의 세상이 전부인 삶. 그런 치쿠에게도 인생의 친구가 있었다. 바로 윈보. 두 펭귄은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한 생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물원의 한 구석에서 정체불명의 알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작고 둥글며, 다른 알들과는 다른 검은 반점이 있는 이상한 알. 다른 펭귄들은 그 알을 꺼려했지만, 치쿠와 윈보는 주저 없이 품었다. 그 알은 어느새 둘의 삶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전쟁이 동물원까지 번져왔고, 혼란 속에서 윈보는 무너진 구조물에 깔려 죽는다. 치쿠는 눈앞에서 친구를 잃은 채, 알을 입에 물고 혼란의 틈을 뚫고 탈출한다. 그는 이제 단 하나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움직인다. 몸은 작고 날개는 짧지만, 치쿠는 그 누구보다 큰 용기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정 중 우연처럼, 혹은 운명처럼 노든을 만난다. 처음 두 동물은 서로를 경계했다. 거대한 코뿔소와 작은 펭귄은 본래 한 무리가 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상실과 외로움, 그리고 지켜야 할 무언가에 대한 의지는 그들을 조금씩 하나로 묶었다. 노든은 말없이 치쿠를 보호했고, 치쿠는 노든 곁에서 알을 품었다. 오른쪽 눈을 다친 치쿠는 점점 시력을 잃어갔지만, 노든은 그에게 새로운 눈이자 날개가 되어주었다. 서로를 지키고, 서로를 의지하며 두 동물은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니었다. 그렇게 치쿠와 노든은 하나의 ‘우리’가 되었다.본문 3 긴긴 밤의 끝에서 마주한 희망
시간이 흐르고, 치쿠는 어느 날 노든에게 조용히 묻는다.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알을 대신 돌봐 줄래?” 그 말은 예언처럼 다가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치쿠는 점점 약해졌고, 마침내 노든의 곁에서 숨을 거둔다. 알 하나만을 남기고. 노든은 슬퍼할 시간도 없이 알을 품는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곧 그는 치쿠가 그랬던 것처럼 알에 체온을 나눠주고, 혼잣말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는 알을 ‘너’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어느 날, 알이 흔들린다. 금이 가고, 작고 까만 부리가 껍질을 깨며 세상으로 나온다. 바로 그 순간, 이 소설의 화자가 누구였는지를 독자는 깨닫는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던 ‘나’는 바로 그 알에서 태어난 펭귄이었던 것이다. 나는 말한다. “노든, 나도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노든은 아주 오래 전,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신이 들었던 말을 되풀이한다.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지.” 이 문장은 세대를 뛰어넘어 전해지는 사랑의 문장이다. 존재의 외형이 무엇이든, 진짜 중요한 건 마음속에 품은 용기와 따뜻함이라는 것을. 『긴긴 밤』의 마지막은 조용하지만 깊은 파동을 남긴다. 이 소설은 단순한 동화가 아니다. 동물들을 빌려 인간의 상실과 슬픔, 연대와 회복,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삶을 이야기한다. 이름 없는 존재들이 서로를 품으며 만들어내는 공동체, 그것이 이 긴긴 밤의 끝에서 마주하는 진짜 희망이다.결론 긴긴 밤은 끝나지 않더라도, 우리는 함께 견딘다
『긴긴 밤』은 상처받은 존재들이 어떻게 다시 사랑을 배우고, 서로를 품으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우리가 살면서 겪는 ‘긴긴 밤’, 즉 상실, 이별, 혼란, 고통의 시간을 견디게 하는 단 한 가지 힘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대답한다. “누군가 곁에 있는 것. 이름이 아니라 마음으로 알아보는 것. 가족이라는 이름 없는 연대.” 루리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삶에는 슬픔이 피할 수 없이 다가오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다는 응원을 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나면, 나에게도 누군가가 "넌 이미 훌륭한 코끼리야, 이제는 훌륭한 너로 살아가면 돼"라고 말해주는 듯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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