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
이 짧은 한 문장이 내가 책 한 권을 고르게 만들었다.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 박정민 배우의 이 추천사는 지금의 독서 시장에서 쉽게 보기 힘든 강렬함을 지녔다. 누군가는 이 한 줄을 도발적이라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반가웠다. 콘텐츠 홍수 속에서 문학은 종종 조용히 잊힌 존재가 되곤 한다. 그런데 이처럼 "소설이 당신의 주말을 뒤흔들 수 있다"고 말해주는 추천사를 만나다니. 그래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이 책을 바로 주문을 했다. 결과적으로, "왜 이제야 만났을까" 싶은 작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본론 1: 『혼모노』 – 7편의 단편, 단 하나의 생략도 없이 강렬하다
이 책에는 총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놀랍게도, 단 하나도 쉽게 넘길 수 없었다. 소설집을 읽다보면 어느 하나는 맥이 빠지거나 정서적으로 거리감이 드는 경우도 있지만, 『혼모노』는 예외다. 각 단편마다 뚜렷한 주제의식과 독창적인 서사가 결합되어 있고, 그 구성은 절묘하게 세공된 듯 치밀하다. 단편의 소재들도 일반적이지 않다. 한때 흠집이 생긴 영화감독을 향한 덕질, 미국에서 처음 한국에 온 이의 극우집회 참여, 그리고 신령이 옮겨간 무당의 이야기까지. 작가는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며 '경계'의 감각을 기민하게 포착해낸다. 특히 무당이 '신'을 잃었을 때의 절박함을 그린 「혼모노」는, 신령이라는 비물질적 존재와 인간의 실존적 무기력을 교차시키며 독자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진짜와 가짜, 믿음과 의심, 무속과 존재의 경계는 그렇게 무너지고 다시 세워진다.
본론 2: 「혼모노」 – 진짜란 무엇인가, 무너지는 믿음 앞에서
이 책의 표제작이자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은 단연코 「혼모노」였다. '혼모노'는 일본어로 '진짜'를 뜻하는 단어의 음차 표기이자, 인터넷상에서는 '진상'이나 '오타쿠'를 조롱하는 신조어로도 쓰인다. 작가는 이 다의적인 단어의 의미를 정면으로 끌어안고 이야기를 풀어낸다. 무당 문수는 30년을 '장수할멈'을 모시며 박수무당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신령이 자신을 떠났고, 그 신은 이제 막 이사 온 신참 무당 신애기에게 옮겨갔다는 말을 듣는다. "신빨이 다 했다더니 진짠가 보네"라는 신애기의 조롱 앞에서 문수는 정체성의 근간이 흔들린다. 진짜 무당은 누구인가? 신을 모신 자가 진짜인가, 아니면 신이 있는 자가 진짜인가? 소설은 극적인 구판의 장면에서 문수가 스스로 자신의 신명을 확인하고자 하는 장면으로 절정을 이룬다. 삼십 년 박수 인생에서 가장 강렬했던 순간, 그는 신이 아닌 자신을 위해 굿을 벌인다. 진짜와 가짜라는 이분법은 무너지고, 인간의 존엄과 존재에 대한 자각이 남는다. 이는 문학이 줄 수 있는 가장 묵직한 감정의 파도다.
본론 3: 「구의 집」 – 구조로 만든 절망의 설계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작품은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였다. 일제강점기, 내무부 시절, 독재정권 시기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건축물. 구의 집은 허구와 현실을 교묘히 엮어, 잊혀진 공간의 역사와 인간의 잔혹함을 조명한다. 구보승이라는 젊은 건축가가 고문시설을 설계하는 이야기. 그는 '창을 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며, 인간에게 희망조차 주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그 창을 다시 설계하며 말한다. "인간에게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이 말이 주는 역설은, 읽는 이를 철저히 부서지게 만든다. 희망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무력감과 두려움이 될 수도 있음을 알게 하는 구조, 그리고 그 구조를 만들어내는 인간. 그 구보승의 말과 침묵 사이에 깃든 슬픔은 잊기 어렵다.
본론 4: 『혼모노』 속 다른 이야기들 – 결핍, 집착, 그리고 생명력
「잉태기」라는 단편에 실린 문장 하나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말해주는 듯하다. "결핍이 집착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애정도 적절히 내어줄 줄 알아야 해." 이 소설집은 '결핍'과 '집착'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자신의 꿈과 능력, 사랑, 가족, 관계, 신념 등에서 결핍을 느낀 이들이 그것을 채우기 위해 집착하며 점차 파괴적인 감정에 잠식당한다. 메탈을 사랑한 고등학생들, 임신한 딸을 향한 가족의 과도한 보호본능,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과잉된 애정과 보호의 이름으로 타인을 해하고, 자신을 소외시킨다. 그러나 작가는 이 파괴의 서사를 통해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잃었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 무엇을 감당하고 있는가?" 그 물음은 각자의 결핍을 인정하고, 적절한 거리에서 애정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단순히 고통의 재현이 아니라, 고통을 직시하고 나아가는 이야기이기에 더 깊다.
결론: 소설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는 우리에게 문학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현실보다 더 날카롭게, 그리고 진실보다 더 진실하게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들. 무당이 신을 잃고도 자기 존재를 찾으려 애쓰는 순간, 건축가가 절망을 설계하다가 희망을 찾는 순간. 그 모든 이야기는 결국, 독자에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감각을 되찾게 한다. 우리는 지금 진짜보다 더 그럴듯한 가짜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허구를 통해 진실을 말하는 문학이 절실하다. 『혼모노』는 그 역할을 정확히 수행하는 작품이다. 어쩌면 진짜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묵직한 숨'을 내쉬며 존재를 되묻는 그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