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바다를 걷는다는 것, 『바당, 길을 걷다』

제주의 바다를 걷는다는 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존재의 무게를 내려놓고 바람과 파도, 빛과 그림자 속에서 다시 나를 만나는 일이다. 김지선 작가의 『바당, 길을 걷다』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제주를 둘러싼 해안길과 그 주변의 사람, 기억, 자연의 숨결을 따라가며 우리 삶의 내면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이 글에서는 책 속 바다길의 감성, 작가의 시선, 그리고 독자에게 건네는 위로를 깊이 있게 나누어 본다.


바당, 길을 걷다



바당을 걷는다는 것: 감각의 회복과 감정의 정화

『바당, 길을 걷다』에서 작가 김지선은 제주의 해안선, 즉 바당길을 따라 걷는다. 단순한 도보 여행기가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과정 속에 감정의 잔해들이 부유하고 다시 가라앉는, 일종의 내면 성찰의 여정을 담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구나 한번쯤 제주의 파도 소리와 그 짠 내음 속에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작가는 자연을 배경으로 인간의 정서를 서정적으로 풀어낸다. 그녀의 문장에서는 피상적인 감탄이 아니라, 실제로 자연에 깊이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만이 내뱉을 수 있는 정직한 단어들이 배어난다. 책 속에 자주 등장하는 감각적 묘사, 이를테면 해녀의 숨비소리, 바람의 결, 이른 아침 바다에 던져진 햇살 같은 표현은 단순히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읽는 사람의 감각을 서서히 깨우고, 때로는 무뎌진 감정을 다시 마주하게 만든다. 독자들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말없이 발을 맞추게 된다. 제주의 바당길을 함께 걷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묘사는 생생하고 섬세하다. 이러한 감각의 회복은 결국 마음의 정화로 이어지며, 도시의 소음과 정보 과잉 속에서 길을 잃은 현대인에게 조용한 위로가 되어준다. 또한 김지선 작가는 어떤 정형화된 ‘제주 감성’을 팔지 않는다. 대신 그곳에서 마주한 사람들과의 짧은 인연, 시간이 만들어낸 풍경의 변화, 그리고 스스로 느낀 고요한 감정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그 덕분에 『바당, 길을 걷다』는 제주에 대한 판타지를 자극하는 책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토대 위에서 살아 숨 쉬는 자연과 사람, 그리고 그 틈에서 비로소 살아있는 ‘나’를 만나는 책이다.


자연을 관찰하는 문장, 그리고 존재에 대한 사유


이 책의 강점 중 하나는 언어의 정제다. 작가는 자칫 낭만적 감상에 머물기 쉬운 여행 에세이의 전형을 벗어나, 시적인 동시에 통찰력 있는 언어로 바다를 그리고 자신을 묘사한다. 그녀가 걷는 바당길은 물리적 거리만이 아니라 정서적 거리, 사회적 거리, 그리고 존재론적 거리까지 아우르는 공간이 된다. 예컨대 해변의 조개껍질 하나를 바라보며 작가는 말한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 같지만, 사실은 파도에 의해 가장 적절한 위치에 도달한 것”이라고. 이 문장에서 우리는 작가가 자연을 통해 인생을 이해하고 있음을 본다. 책 곳곳에는 이렇게 순간과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유가 촘촘히 박혀 있다. 바람, 파도, 뻘, 나무, 돌담, 물결의 음영 같은 소재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인물처럼 기능하며,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반사하고 증폭시킨다. 마치 시 한 편을 읽는 듯한 인상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들은 독자에게도 시선을 바깥에서 안으로, 다시 밖으로 순환시키는 사고의 여정을 유도한다. 작가는 단정하지 않는다. 삶이 그렇듯, 길도 그렇게 흘러간다고 말한다. 계절이 바뀌듯 마음도 흐르고, 한 순간 머물렀던 장소가 시간이 지나면 전혀 다른 감정을 일으킬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 깨달음은 삶을 결코 ‘목적지’ 중심으로 보지 않게 만든다. 대신 여정을 주목하게 한다. 걷는 동안 변화하는 자신, 바람을 따라 달라지는 시선, 예기치 않게 다가오는 감정들에 집중하게 한다.


혼자 걷는 길에서 만나는 타인들


이 책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작가가 제주를 혼자 걷는 동안 마주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은 단순한 배경 인물이 아니라, 작가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그 자리에 없어도 그들의 흔적이 풍경 속에 남아 독자와 교감한다. 특히 해녀와의 만남, 동네 어르신과의 짧은 인사, 오래된 해안 마을에서 들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제주라는 공간을 단지 ‘관광지’가 아니라 ‘삶의 터전’으로 바꿔 놓는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때, 우리는 바당길을 걷는 여정이 단순한 휴식이나 힐링이 아니라 공존의 감각을 되찾는 과정임을 이해하게 된다. 작가는 타인과의 만남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존중하며 기록한다. 그 진솔한 시선은 독자로 하여금 사람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게 만들고, 느슨해진 인간관계를 돌아보게 만든다. 혼자 걷는 길은 고독의 여정이기도 하지만, 『바당, 길을 걷다』에서는 그것이 타인을 향한 문이 되기도 한다. 침묵 속에서 오히려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 말보다는 존재 자체로 서로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작가는 조용히 일깨운다.


바다와 사람 사이의 고요한 언어


『바당, 길을 걷다』는 여행기 이상의 기록이다. 바다를 걷는다는 단순한 행위 속에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자연과 사람, 나 자신과의 관계를 성찰하게 하는 책이다. 그 길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책을 덮고 나면 누구나 자기만의 바당길을 걷고 싶어질 것이다. 김지선 작가의 문장은 화려하지 않지만 깊고 단단하다. 그래서 이 책은 오래 남는다. 읽는 내내 마음이 조용해지고, 길 위에서 바람과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든다. 바다와 사람 사이를 잇는 고요한 언어가 바로 이 책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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