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과』 리뷰 — 말랑한 귤 한 조각이 되기까지, 한 킬러의 마지막 감정


가끔, 어떤 이야기는 "사람"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 그것은 단지 생각하는 능력 때문일까요? 혹은 언어를 사용할 수 있어서일까요? 구병모 작가의 장편소설 『파과』는 이 질문에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답합니다. “아니요, 인간은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이다.” 이 작품은 수십 년간 사람을 죽이며 살아온 노년의 여성 킬러, ‘조각’이 삶의 끝자락에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지키고자 했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잃을 것이 없었던 자에게 생긴 단 하나의 감정,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이야기. 오늘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소설 『파과』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그 울림을 함께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파과


1️⃣ 상처로 깎여 만든 ‘조각’, 그리고 킬러의 삶


『파과』의 주인공은 60대 중반의 여성 ‘조각’입니다. 일반적인 노인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존재죠. 그녀는 노련한 킬러로, 젊은 시절부터 수십 년을 사람을 죽이며 살아온 인물입니다. 미용실이나 시장에서 “어머니”라 불릴 법한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 그녀는 그 누구의 어머니도 아닙니다. 조각이라는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조각—부서지고 깎여나가 남은 무언가. 이는 그녀의 삶이 어릴 적부터 얼마나 험난하고 파편화되어 있었는지를 암시합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애매한’ 위치에 태어난 조각은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결국 남의 집 식모살이로 버려지듯 보내집니다. 그 집에서 사고를 쳐 쫓겨난 이후, 그녀의 삶은 더 깊은 어둠으로 내려갑니다. 돌아갈 집은 이미 떠나갔고, 그녀는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으로 킬러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 설정만으로도 『파과』는 단순한 스릴러가 아닌 “인간이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각은 킬러가 되어서도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지 않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타인은 언제든 의뢰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감정은 생존에 있어 불필요한 장애물입니다. 그렇게 ‘지켜야 할 것 만들지 않기’를 원칙으로 삼아 살아가던 그녀는, 오랜 동료이자 스승인 류를 잃고 난 후에도 무덤덤하게 일상을 이어갑니다. 어쩌면 그녀는 삶에서 지킬 것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가볍고 자유로운지를 체화하고 있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조각의 내면에 말랑한 귤 한 조각 같은 감정이 스며들기 시작한 순간부터, 소설은 전혀 다른 장르로 변모합니다.



2️⃣ 귤의 말랑함처럼 — 불시에 찾아온 감정의 틈


조각은 어느 날, 의뢰를 수행하다가 오히려 공격을 받고 중상을 입습니다. 자신이 자주 찾던 병원으로 힘겹게 몸을 끌고 가지만, 익숙한 의사 대신 젊은 강 박사가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는 조각의 수상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심 없이 그녀를 환자로 대하고 성심껏 치료합니다. 이때부터 조각의 마음에 미묘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혹은 삶을 지나오며 미처 경험하지 못한 ‘사랑’이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죠. 그녀는 강 박사와 그의 가족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의 삶은 조각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양지의 삶’입니다. 따뜻한 가정, 순수한 아이, 소소한 대화와 웃음이 있는 일상. 조각은 이들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래서 더욱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커져갑니다. 마치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위안이 되는 존재처럼 말이죠. 이 감정을 상징하는 장면은 바로 ‘귤’입니다. 조각이 강 박사의 어머니로부터 건네받은 귤을 껍질 벗기며 입에 넣는 장면은 단순한 먹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방어막이 한 꺼풀 벗겨지는 은유적 장면입니다. 달콤하고 청량한 귤의 맛이 그녀에게 세로토닌처럼 감정적 안정을 선사합니다. 이 장면 이후 조각은 더 이상 ‘킬러’라는 정체성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 인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행동—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불쌍한 이를 보고 마음이 쓰이거나—를 서슴없이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변화는 문제의 발단이 되기도 합니다. 그녀의 조직 내 다른 킬러 ‘투’는 조각의 변화가 못마땅합니다. 무표정하고 냉혹해야 할 킬러가 웃고, 다른 사람에게 연민을 보이며, 무엇인가를 지키고자 한다는 것은 곧 조직의 원칙을 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투는 결국 조각이 관심을 갖게 된 강 박사의 가족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사랑은 약함인가, 강함인가?” 조각은 누구보다 강한 킬러였지만, 사랑을 느낀 순간부터 그녀의 약점은 명확해졌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사랑은 그녀가 처음으로 ‘지키고자’ 행동하게 만든 힘이 됩니다. 이는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로, 사랑이란 인간에게 약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을 움직이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3️⃣ 흠집 난 과일이라도, 달콤함을 잃지 않듯이


『파과』라는 제목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파과’는 일본어로 ‘흠집 난 과일’ 혹은 ‘너무 익어 물러진 과일’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는 주인공 조각의 삶을 그대로 압축한 단어입니다. 어릴 적 가족에게 버림받고, 사랑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채 살아온 그녀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이미 ‘흠집 난 과일’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구병모 작가는 이 흠집 난 과일이 여전히 달콤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조각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는 쪽으로 감정을 배웁니다. 그녀는 강 박사와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끝내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그들의 평화를 지켜냅니다. 그녀의 감정은 일방적이고, 결코 회수되지 않으며,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지도 않지만, 그 자체로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조각의 사랑은 연보라색에 가깝습니다. 말랑하고 따뜻하지만, 한발 물러선 곳에서 조용히 빛나는 색. 연인의 사랑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사랑. 그래서 조각은 마침내 진정한 인간이 됩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로 변화한 것입니다. 그 과정이 슬프면서도 아름답고, 또한 독자로 하여금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결론: 마지막 사랑, 그리고 인간다움의 증명


『파과』는 단순한 액션 스릴러나 감정 소설이 아닙니다. 이 소설은 우리 모두가 잊고 있던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가?” 조각은 늙은 킬러였고, 사람들을 죽여온 삶을 살았지만,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무언가를 지키려 했던 인간이었습니다. 그녀가 끝내 도달한 감정은, 곧 사랑이었고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이었습니다. 구병모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나이, 성별, 직업, 삶의 방식과는 상관없이 인간의 본질적인 능력으로 제시합니다. 늦게 피는 사랑일수록 더 깊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진리를, ‘흠집 난 과일’도 충분히 달콤할 수 있다는 따뜻한 메시지를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삶이 삭막하게 느껴진다면, 또는 내가 어떤 감정을 느낄 자격조차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면, 『파과』는 당신의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져줄 것입니다. 한 번쯤은 살아온 생을 돌아보며,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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