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상처를 넘는 사랑과 증언의 서사,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강 작가가 5.18 이후의 자전적 상처와 제주 4.3 사건의 비극을 중첩시키며, 죽음을 지나 사랑과 기억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선형적 플롯을 거부하고, 현실과 꿈, 과거와 현재, 사실과 상상,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복합적인 서사로 구성되어 있다. 이 리뷰는 한강 작가 특유의 서정적이면서도 치밀한 문장과 함께, 기억해야만 살아남는 진실, 말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생명, 작별하지 않기 위한 기록의 힘에 대해 성찰한다.


작별하지 않는다.



기억의 서사, 꿈과 현실을 오가는 경하의 여정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줄거리 요약이 무의미할 정도로 복잡한 시간성과 내면적 구조를 지닌 소설이다. 이 작품은 ‘경하’라는 인물의 꿈에서 시작된다. 수천 개의 묘목, 그늘진 겨울의 숲, 눈이 소복이 쌓이는 장면은 이미 한강의 세계관을 예감케 하며, 독자는 이내 비극의 기억 속으로 유입된다. 경하는 5.18 관련 책을 쓴 후 심신이 고갈된 상태로 제주도에서 온 오랜 친구 인선의 연락을 받게 된다. "경하야, 지금 와줄 수 있어. 신분증 꼭 챙기고."라는 문장은 소설 전반에 흐르는 어떤 절박함의 시작점이다. 경하가 향하는 병원에는 손가락이 절단된 인선이 있다. 인선은 과거 한국군 성폭력 생존자, 독립운동가, 치매 노인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스트다. 그리고 이제는 그 자신이 통증을 통해 살아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녀가 말한다. “피가 멈추면 안 돼. 계속 아파야 해.” 이 문장은 단순한 물리적 진단을 넘어, 소설 전반에 깔리는 정서, 즉 ‘계속 기억해야만 살아남는다’는 주제를 예고한다. 경하와 인선은 단순한 과거의 친구가 아니다.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는 이들이다. 경하가 유서를 수차례 쓰고 찢어버리는 반복 행위는, 삶의 끝자락에서 마지막 끈을 붙들고 있는 인간의 갈등을 상징한다. 하지만 인선의 부탁으로,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도 모를 새 ‘아마’를 확인하러 제주도로 향한다. 이는 곧, 타인의 생명을 통해 자신의 생을 연장해보려는 경하의 무의식적 몸부림이기도 하다. 눈은 끊임없이 내리고, 버스는 깊은 중산간 마을로 향한다. 눈에 덮여버린 발자국, 얼어붙은 산길, 현무암처럼 구멍 난 새의 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의 기운 속에서 경하는 혼란과 생사의 경계에 선다. 그리고 이 여정은 단순히 친구의 부탁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그녀 자신의 ‘기억과 상처의 심연’을 마주하는 내면 탐사로 나아간다. 그녀는 죽음을 향하던 자신의 걸음을, 죽은 새의 무덤 앞에서 멈춘다. 사랑하지 않았음에도 슬퍼지는 감정, 묻은 자리에 남은 따뜻함, 그리고 그 눈 아래에서 되살아나는 역사.


4.3 사건과 집단적 기억의 호출: 말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역사'로 구성된다. 인선의 엄마 정심은 오빠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말을 잃었으며, 국민보도연맹 사건까지 이어지는 비극의 계보는, 결국 인선에게 유전된다. 그녀가 다큐멘터리스트가 된 이유, 그 과거에 침묵하지 않고자 함이다. 인선이 꺼내는 상자 안에는 신문 스크랩, 사진, 증언이 담겨 있다. 이는 단순한 기록이 아닌, 집단적 트라우마를 응시하고 기억하려는 노력이다. 그 안에는 제주도 해안에서 5km 이내로 내려오지 않으면 모두 빨갱이로 간주하던 시대의 포고령, 불타 사라진 중산간 마을 109곳의 흔적, 그리고 아직도 유해가 수습되지 못한 채 바다에 가라앉아 있는 진실들이 담겨 있다. 경하와 인선은 ‘진실이 말해지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임을 안다. 이는 단순한 역사 고발이 아니다. 기억은 고통을 동반하며,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행위 자체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임을 말한다. 인선은 찢어지는 상처를 봉합하는 과정에서 아픔을 견뎌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곧 4.3 사건과 같은 역사도 고통 속에서 이어져야만 기억된다는 메시지다. 국가와 개인의 상처가 중첩되는 구조는, 독자에게 “당신은 이 고통과 무관한가?”라고 묻는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 물음에 강요 없이 조용히 그러나 깊숙이 다가선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인선과 경하는 함께 걷는다. 불을 들고. 과거 학살자들이 발자국을 지우고 도망쳤던 눈밭을, 이번에는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간다. 이 반전된 장면은 과거를 직시하고, 기억의 흔적을 남기겠다는 선언이다.


작별하지 않는 존재들: 사랑, 새, 그리고 평행 세계의 가능성


『작별하지 않는다』는 문학이 줄 수 있는 가장 강한 위로 중 하나인 ‘함께 기억하는 행위’에 집중한다. 경하와 인선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 죽음과 삶의 문턱에서 서로를 붙든다. 아마가 죽었으나 다시 살아나 있는 장면, 잘렸던 손가락이 다시 붙은 듯한 환상, 살아 있을 리 없는 인선이 차를 끓여주는 광경은 현실을 넘어선 공동의 기억 공간으로 독자를 이끈다. 이러한 평행 세계 혹은 꿈의 장치는 비현실적이면서도 깊이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환상은 기억이 만들어낸 공간이기 때문이다. 인선과 경하는 같은 꿈을 꾸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나눈 따뜻한 말, 국수 한 그릇, 차 한 잔, 새의 무덤을 같이 보는 눈동자는 모두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한강은 여기서 사랑을 말한다. 연인 같은, 친구 같은, 가족 같은 이름붙일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작별하지 않는’ 감정을 견고히 쌓는다. 그 감정은 죽은 자를 향한 것이기도 하고, 살아남은 자가 스스로를 버리지 않게 해주는 감정이기도 하다. 결국, "하지만 새가 있어"라는 문장이 모든 것을 대변한다.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살아야 할 이유를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다시 걸을 수 있다는 선언이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곧, 잊지 않겠다는 말이다. 유서를 쓰고 찢고 다시 쓰던 경하가 끝내 유서의 발신인을 적지 못했던 이유, 그리고 죽고 싶었으나 끝내 살아남았던 이유는 바로 기억 때문이다. 새가 있었고, 인선이 있었고, 기억해야 할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문학, 기록하는 사랑, 그리고 작별하지 않음의 윤리


『작별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기억과 윤리의 기록이다. 이 작품은 말하지 않으면 사라질 진실, 사랑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상처, 기억하지 않으면 다시 반복될 폭력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경하와 인선이 나눈 작은 말들, 인선의 엄마 정심이 건넨 침묵의 서사, 그리고 아마를 묻는 행위 속에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 잊지 말아야 할 이유가 담겨 있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무관한가?” 그리고 이렇게 되묻는다. “당신은 작별했는가?” 우리는 그 질문 앞에서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을 덮고 난 후, 누구도 ‘작별했다’고는 쉽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새가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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